축잘알이 되기 위한 첫 걸음, 80년대 세리에는 어땠는가 시리즈
1편 : https://m.fmkorea.com/2954492430
2편 : https://www.fmkorea.com/2955030378
3편 : https://www.fmkorea.com/2956059329
번외
들어가기에 앞서
87/88 시즌 이후 마라도나가 이끄는 나폴리와 굴리트가 이끄는 밀란이 세리에A의 양강 구도를 이루는 듯 싶었다. 그러나 이를 뒤엎을 수 있을만한 두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하나는 기존 16개팀의 리그 체제에서 18개팀의 리그 체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탈란타가 추가적으로 승격을 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의 변화는 세리에A에서 허용하는 외국인 용병의 수가 2명에서 3명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이탈리아 클럽들이 추가적인 외국인 용병의 영입을 시도했다. 서독의 마테우스와 브레메, 돈발롱 최우수 외국인 상의 알레망, 소련 최고의 선수인 자바로프. 그외에도 레나토나 티타 그리고 카니쟈 등...
실력 있는 외국인 용병들이 새로이 세리에A 무대에 도착했으나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받았던 것은 레이카르트였다. 그는 유로 88에서 아주 좋은 모습을 보였고 네덜란드의 첫 메이저 우승에 큰 기여를 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새로 합류한 레이카르트와 지난 시즌 마라도나에 버금 갔던 굴리트 그리고 유로 88을 제패한 반 바스텐으로 이뤄진 튤립 삼총사를 갖춘 전 시즌 깜피오네 밀란은 전력이 극대화되었다고 평가 받아 새 시즌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가 되었다.
군웅할거의 시작
팔카오, 플라티니, 지쿠, 루메니게, 소크라치스, 수네스 등 명성이 자자한 월드클래스 슈퍼스타들이 즐비했던 80년대 초중반의 세리에A에 비하여 이 시기의 세리에A 용병들의 이름값은 마라도나와 굴리트의 이름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편이었다. 그러나 팀적인 측면에서 세리에A 클럽들은 전반적으로 전력이 더욱 상승되어 유럽 대회에서도 강세를 보였다. 이것은 세리에A로 오는 용병들의 상황적 차이 때문이었다. 앞서 이탈리아에 온 지쿠, 루메니게와 같은 무리들은 기량의 절정기를 맞이하여 명성이 온 세계에 뻗어 있던 선수들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은 절정이던 나이를 지나 서른 무렵에 이탈리아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금씩 혹은 빠르게 쇠퇴를 하였다. 반면, 80년 후반에 세리에A 무대로 온 선수들은 보다 연령대가 낮은 편이었다. 그들은 슈퍼스타는 아니었으나 전성기에 돌입해 명성을 쌓아가던 샛별들이었다. 대표적으로 반 바스텐과 레이카르트가 이에 해당한다. 다른 이유로는 이탈리아인 선수들의 상향 평준화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정말 재능 있는 선수들이 대거 나타나기 시작했다. 말디니, 비알리, 만치니, 바죠 등등...
각 클럽이 저마다 바쁜 이적 시장을 보내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새 시대의 다음 깜피오네로는 기존의 전력과 성적이 좋고 여름에 보강도 잘 한 밀란과 나폴리가 유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황금기에 첫 술을 뜬 것은 양강 구도를 이룰 것이라 예측되던 밀란도 나폴리도 아닌 인테르였다.
깜피오네 인테르!
인테르는 87년 여름, 86/87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난 루메니게를 대체하기 위하여 86 월드컵 활약으로 이름을 높이고 있던 엔조 시포를 거액에 영입했다. 그러나 엔조 시포는 실패했고 인테르는 리그 5위에 그쳤었다. 88/89 시즌을 앞두고 엔조 시포를 방출한 인테르는 마테우스와 브레메 그리고 라몬 디아즈를 용병으로 영입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선수로는 베르티와 비앙키를 영입했다. 베르티는 당시 피오렌티나에서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로 주가를 크게 올리던 선수로 이적료는 7.2m 리라였으며 이는 마테우스(5.6m 리라)보다 비쌌다. 인테르는 이 해 여름 이적시장에서만 최소 19.1m 리라 정도 되는 거액을 지출했다.
<88/89 시즌 인테르의 포메이션, 조나미스타 형태>
인테르는 이탈리아 다운 전술들의 대가였던 트라파토니 감독의 지도 아래 조나 미스타 포메이션을 사용하였다. 베스트 11의 면면을 살펴보면 골키퍼였던 젱가는 당시 최고의 골키퍼이던 다사예프 다음 가는 선수. 오른쪽 풀백인 베르고미는 젠틸레의 뒤를 이은 후계자이자 올해 연말에 꼽는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에 오른 레전드. 왼쪽 풀백인 브레메 또한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에 오른 레전드이다. 페리는 80년대 최고의 스토퍼로 꼽히는 비에르코보드를 국가대표 주전 자리에서 끌어내린 월드클래스 레벨의 스토퍼였다. 리베로였던 만도를리니는 평범한 축이었지만 나쁜 편도 아니다. 미드필더 가운데 마테우스는 설명이 필요 없는 레전드이다. 베르티는 90월드컵과 94월드컵에서 주전 미드필더였던 실력 있는 선수로 원래는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이던 선수였다. 마테올리는 베르티를 비롯해 안첼로티, 바그니, 데 나폴리 등에게 밀려 국가대표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 했지만 80년대 후반에 이탈리아에서 이름 있는 플레이메이커였다. 오른쪽 윙인 비앙키는 평범한 축에 속하는 선수이나 아리고 사키가 '뛰어난 역동성과 훌륭한 전술감각을 가져 항상 플레이를 할 가치가 있는 선수'라 평했 듯이 팀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다. 공격수 중 라몬 디아즈는 82년부터 세리에A에서 뛴 잔뼈가 굵은 용병이었다. 그는 79년 청소년 월드컵에서 마라도나의 파트너로 뛰며 대회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레나는 이전부터 재능 있다고 평가 받던 이탈리아 공격수로 오랜 임대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인테르로 돌아온 선수였다. 그러나 이 선수단으로 이뤄진 인테르는 시즌 전 예상에서 우승 후보로 평가 받지는 못 했다. 그것은 인테르가 전 시즌 5위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펼친 것과 마테우스나 브레메, 페리와 같은 선수들이 아직 오늘날 평가 받는 수준으로 위상에 도달하지 못 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전술적으로, 인테르는 감독인 트라파토니의 전술적인 기조를 따라 카테나치오와 토탈 싸커가 가진 양면을 잘 결합하여 사용하였다. 카테나치오 포메이션을 기본으로 하여 경기장 중앙에서 이뤄지는 빠르고 수직적인 역습을 중요시 했는데, 소수의 선수들만이 역습을 하던 기존의 카테나치오에서 벗어나 팀 전체가 전진하며 역습에 참가하는 토탈 풋볼 방식을 사용했다. 그리고 세컨드 볼을 차지하는 것과 세트플레이를 중요시 여기던 팀이었다. 수비적으로는 대인 마크와 지역 방어가 혼재된 방식을 사용하였고 역습을 하기 위해 상대를 일정 선상까지 끌어들인 후 압박을 가하는 수비 전략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미드필더들이 가장 중요했고 그들에게는 좋은 기술 뿐만 아니라 뛰어난 체력과 뛰고자 하는 의지가 요구되었다.
베르티-마테우스-마테올리로 이뤄진 중원의 삼각 편대는 감독의 요구에 부합하는 선수들로 팀의 원동력이었다. 그 중 마테우스가 팀 내 최고 기량의 선수로서 팀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했고 마테올리가 팀 전체를 조율하는 두뇌의 역할을 맡았었다. 사실 마테올리는 본디 10번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는 선수였다. 하지만 마테우스의 합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레지스타의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
위 그림은 당시 마테올리를 레지스타로 내세운 인테르의 조나 미스타 포지션이다. 역삼각형 형태의 중원을 이루고 있는데 이 시즌 동안 이러한 형태를 고수헀던 것은 아니다. 뛰어난 전술가인 트라파토니는 종종 형태를 바꾸곤 했는데 베르티와 마테올리를 아랫변에 두고 마테우스를 윗꼭지점에 배치하는 삼각형 형태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선수 구성에 따라 마테올리에게 9번 유니폼을 입히고 공격수로 뛰게 하기도 했다.
즉, 인테르는 34경기 시대 첫 우승 클럽이자 최다 승점 우승의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전술 수행 능력이 우수한 선수들로 구성된 스쿼드와 뛰어난 전술과 전략을 가진 감독의 합작 덕분이었다.
알도 세레나
인테르의 우승은 팀이 가진 우수한 시스템 덕이 크지만 직접적으로 승리를 가져온 인물을 꼽으라면 센터 포워드인 알도 세레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세레나는 해당 시즌 32경기에서 22골을 넣으면서 득점왕을 차지 했는데 해트트릭을 기록한 적은 없지만 대신 17경기에서 득점에 성공하는 꾸준함을 보였다. 또한, 9경기에서 동점골 혹은 결승골을 넣는 영양가 있는 활약을 했다. 세레나는 언론으로부터의 평가도 좋았는데 구에린 스포르티보가 꼽는 주간 TOP10에 15회나 선정되면 종전의 마라도나와 굴리트가 세운 12회 기록을 넘어섰고, 시즌 종료 후 가제타가 발표한 인테르 선수단 평점에서도 8.5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세레나는 키 186cm의 장신 공격수로 어릴 적 농구 선수로 뛴 경험이 있었기에 제공권이 좋았다. 그래서 해당 시즌 22골 가운데 10골을 머리로 넣었다. 그리고 그는 왼발 잡이이지만 22골 중 6골은 왼발로 4골은 오른발로 넣을 정도로 오른발도 잘 쓰는 선수였다. (나머지 2골은 PK 득점)
그렇지만 국가대표에서는 주전으로 자리 잡지 못 했던 선수였는데, 득점 페이스가 좋던 88/89 시즌에 잠시 주전 자리를 차지했을 뿐 곧 자신보다 다재다능했던 나폴리의 카르네발레에게 밀리고 만다. 그도 9번이나 11번 공격수로 뛸 수 있는 다재다능함은 있었으나 국제 대회에서 크게 발휘될 그릇은 아녔고 22골을 넣은 꾸준한 득점력도 88/89 시즌에 한정하여 일어난 플루크였을 뿐이었므로 자연스럽게 후보로 밀려난 것이다.
UEFA컵의 승자 나폴리
월드컵도 있고 스쿠데토와 코파 이탈리아도 거머 쥔 마라도나는 정작 유럽 대회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 했다. 86/87 시즌, 처음 나간 UEFA 컵에서는 첫 라운드에 탈락하는 수모를 겪고 87/88 시즌에 나간 유로피언컵에서는 하필이면 두번째 라운드에서 당시 세계 최고의 전력을 갖춘 팀으로 꼽히던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지고 말았다. 그러나 88/89 시즌을 앞두고 나폴리의 스쿼드 개편이 한 차례 더 이뤄지면서 당시 유럽 대회에서 우승을 노리는 클럽들만큼의 전력이 되었다. 나폴리는 노쇠화를 보이던 바그니, 페라리오, 갈렐라를 방출하고
푸시,
크리파,
귈리아니,
코라르디니를 영입해 보강을 했다. 특히, 87/88 시즌 돈발롱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을 수상한 브라질 국가대표
알레망을 영입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UEFA컵 나폴리 선수단 평점, 가제타>
그러나 마라도나가 예전과 같지 못 햇다. 여전히 그는 최고 수준의 선수였지만 나폴리에 입단한 이례로 가장 기복이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기복은 리그 레이스에서 약간의 문제가 되었고 시즌 내내 1위였던 인테르와 격차를 좀처럼 좁히지 못 했다. 그럼에도 그의 특별함은 여전히 날카롭게 살아 있었고 이것은 UEFA 컵에서 발휘되었다. 나폴리는 UEFA컵 토너먼트 동안 18골을 넣었는데 마라도나는 대회 3골 9어시스트를 달성했다. 특히 뮌헨과 4강 1,2차전 경기에서 4어시를 기록하고 슈투르가르트와의 결승 1,2차전에서도 1골 3어시를 기록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이런 그를 두고 가제타에서는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거의 최선을 다하지 않지만 거의 항상 차이를 만들어낸다. 마라도나는 보편적인 모순이다'
한편, 마라도나가 절제력을 잃은 사생활로 기복을 얻은 사이에 그만큼의 공백을 잘 메꿔준 선수가 바로 카레카였다. 오늘날 카레카라는 이름은 그리 유명하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86년 월드컵에서 5골을 넣었던 월드 스타이자 우고 산체스, 반 바스텐과 같은 자리에 서 있을만큼 뛰어난 월드 클래스 공격수였다. 그는 리그에서 30경기동안 19골을 넣었고 UEFA 컵에서는 12경기 동안 6골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중 5골이 4강과 결승전에서 나왔다. 재밌는 점은 그가 UEFA컵에서 넣은 6골 모두 마라도나의 어시스트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카레카와 마라도나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조합이었는지를 말해준다.
리그와 UEFA컵을 통틀어 그는 88/89 시즌 마라도나와 함께 나폴리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가제타의 평점에 따르면 나폴리 선수 중 UEFA컵 최고 평점을 기록하였는데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비유럽인도 발롱도르 수상에 참여할 수 있었다면 89년 발롱도르를 차지하는 반 바스텐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법한 선수가 카레카라고 생각한다.
6-2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