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에도 재미없는 철포의 영향에 관한 글
일본은 대포의 사용이 적었기 떄문에,
일본의 성벽은 다른 지역의 성벽과 다른 양상을 띄었습니다.
일본의 성벽들이 대포라는 요소를 적게 고려한 대신
철포라는 새로운 무기가 성벽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산성의 쇠퇴
전국시대 초기, 대부분이 고만고만한 다이묘들뿐이었을 때는
대부분의 성들이 산성이었습니다.
평지에 성을 쌓으면,
운송과 관리가 편하겠지만,
방어를 위해서 성벽을 높이쌓고, 해자를 둘러야 하는데,
고만고만한 다이묘들은 그럴 돈이 없기 때문에,
적은 공사로도 큰 방어력을 갖출 수 있는 산성에 집중하게 됩니다.

공성전에서의 백병전은, 공격측의 숫적우위가 사라진다.게다가 방어측은 성벽을 끼고 높은 곳에서 싸운다.
하지만 이런 많은 산성들에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철포입니다.
오다군(오다 사후에는 도요토미군)의 공성전을 분석하면,
철포 도입 이전의 20건의 공성전에서
함락까지의 공성전 소요 일수가 45일 정도임에 비하여,
철포 도입후 16건의 공성전에서는
고작 18일 정도로, 60% 넘게 감소하였습니다.

물론 오다군이 성장함에 따라,타 세력과의 군사력 차이가 벌어져, 공성전이 일찍 끝났던 면도 있지만,
평지의 성들과 비교해봐도, 산성의 공성 소요일수가 더 현저히 감소했다.
모리군의 공성전들을 예로 들자면,
다카오 공성전 개시 15일 후, 공성장비가 완성되어,
그로부터 2일 후에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이떄, 공성 장비를 통한 공격 당시,
3000정의 철포로 성벽을 제압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부젠카와라다케 성 공격시에는,
모리군이 철포병을 동반하여,
방어측을 제압함과 동시에, 성의 일곽을 점거하여,
그곳을 기반으로한 공격으로 함락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백병전에서는 무효화되는 공격자의 숫적우위를
철포는 성벽안의 방어자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공격측은 철포병의 화력을 바탕으로
성의 일곽을 한순간에 제압하여,
그곳으로 화력과 병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면서,
성곽전체를 단기간에 공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해자의 중요성 증가
산성의 방어력이 철포의 등장으로 감소한 반면에,
해자의 중요성은 매우 올라갔습니다.
철포의 사거리 밖으로 성벽을 높이 쌓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해자는 수평적으로 성벽의 방어군과 철포를 떼어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높은 곳의 이점은 존재합니다.
높은 곳에 진을 치고, 적들을 내려다보며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은
전국시대에서도 천년전 사람인 제갈량도 인정할 것입니다.
철포 등장 이후에도,
해자로 삼을 만한 수원 근처에서
작은 산을 기반으로 성을 쌓기도 했습니다.

작은 산을 기반으로 하여,북쪽의 수원을 통해 해자를 만든 가메야마 성
차이점은 이전의 산성은
더욱 공격하기 어려운 산에 산성을 쌓았다면,
이후의 산성은 매우 작은 산이더라도,
주변에 강이 있거나 하여, 해자를 쌓기 좋은 위치에 성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존재했던 대부분의 산성은
철포 도입 이전에 지어진, 해자를 고려하지 않은 산성이었고,
그 대부분의 산성들이 철포에 무력했습니다.
또한 성을 신축할 때,
산성은 그 산까지 건축자재를 날라야하고,
험준함의 이점이 예전 같지 않은 반면에,
평지의 성들은 농사도 더 많이 지을 수 있고,
운송, 무역, 관리에 있어서도 편하며,
해자로도 충분히 방어력이 있기 때문에,
굳이 산에 성을 쌓을 필요가 없죠.
따라서 철포 도입후에는,
산성의 축성 비율이 떨어지게 됩니다.
해자의 단점
해자 또한 단점은 있습니다.
바로 만드는데 드는 비용과 시간입니다.
해자를 파는데 드는 시간은,
성벽의 그것보다 더 길었습니다.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비용 또한 많이 들었고요.
작은 산을 기반으로한 후쿠치마야성 또한,
본래 해자로 둘러싸는 것을 목표로 했다가 중단되었습니다.

후쿠치마야성에 해자가 생기기는 했지만,성곽이 완공되고 수십년 뒤에야 해자를 파기 시작했다.
평지에 있는 키타쇼 성은
본래 해자로 둘러싸는 것으로 계획했지만,
결국 4년동안 해자를 파다가,
미완성의 상태로 방치되었습니다.
또한 마츠구라 가문은
7년만에 인공으로 된 해자를 완성하였지만,
이 기간동안 노동력이나 세금 착취가 가혹하게 이루어져,
결국 대규모 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1593년 쌓기 시작한 모리오코 성은,수원으로 삼던 강이 자주 범람하여,
해자의 완공까지 41년이 걸렸다.
또한 평지에 성을 쌓는다면,
필연적으로 4방면 모두 해자를 파야했습니다.
해자가 미완성 된채로 평지에 성을 쌓는다면,
결국 산성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방어력을 가지게 됩니다.
결국 고만고만한 다이묘들은,
해자의 중요성을 알고도, 여전히 산성에 거주해야 했습니다.
해자가 비용은 비싸지만 효과는 좋다고?
진행시켜!
하지만 이러한 양상도 철포가 바꾸게 됩니다.
철포의 높은 사상률은 패배측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안겼고,
결국 전투 한번 할 때마다의 승자의 이익은 커져갔습니다.
따라서, 철포 도입 이전의 다이묘들보다
훨씬 규모가 큰 다이묘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충분히 4 방면의 해자를 갖출 재력이 있었으며,
평지에 성을 쌓아, 농업*상업에서의 이점도 챙기려 하였습니다.

평지에 쌓은, 해자로 둘러싼 성산성 같은 높이의 이점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성벽을 높이 쌓고, 해자를 여러겹으로 팠다.
물론 이들에게도 방해요소가 있었으니,
아무리 재력이 있어도, 시간을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비교적 후방의 안정된 지역에서는
긴 시간동안, 평지에 해자를 갖춘 성을 쌓을 수 있었지만,
최전선에서 방어를 위해 성을 쌓을 때에는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평지에 성을 쌓은 다음, 아직 1,2 방향의 해자를 아직 완공시키지 못하다가,
그 사이 적이 해자가 없는 곳으로 침공하면 큰일이니까요.
따라서
최전선의 성들 또는 4방향 모두 해자를 갖출 여유가 없었던 성들은
절벽이나 낭떠러지를 성의 한쪽 벽면으로,
또 한쪽은 해자를 갖춘 벽면으로 하여
성을 세웠습니다. (이를 평산성이라 합니다)
일단 절벽이나 산 인근에 터를 잡고, 평지와 이어진 일부에서만 해자를 판 뒤,

시간적, 재정적 여유를 확보하면, 비로소 해자로 성을 감싸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이유들로,
새롭게 쌓는 성들 중
산성의 비율은 감소하고,
평지나, 평지와 산의 중추부에 쌓는 성들은 증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요토미, 도쿠가와 통일 정권기에 이르러서는
돈을 이유로 아직도 산성에 거주하는 성주들을
해자를 갖춘 평성으로 이주하게끔 압박하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성을 새롭게 건축할 때, 산성으로는 짓지 못하게 하는,
'산성정지령'을 내린다.
재미없는 철포의 영향 내용은 끝났습니다.
다음 글은
일본이 철포를 어떻게 운용하였는지,
왜 그렇게 운용했는지, (사실상 답은 나와있지만...)
서양과는 어떻게 다른지,
임진왜란에서는 어땠는지
다뤄보겠습니다.
https://www.fmkorea.com/3254855407 (철포의 야전에서의 영향)